자신이 당한 스토킹 범죄 실화 바탕으로 한 넷플릭스 화제작 《베이비 레인디어》

‘친절하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힘겨운 싸움을 하는 중이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내려온 이 격언은 삶의 중요한 지혜를 알려준다. 그러나 때로 의도와 결과는 심각한 엇박자를 낸다. 영국에서 만든 넷플릭스 7부작 오리지널 《베이비 레인디어》는 사소한 친절에서 시작된 스토킹 범죄를 다뤘다. 

포스터만 보면 가벼운 코미디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속내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상상 이상으로 복잡성을 띠는 범죄 피해자의 내면을 그대로 펼쳐 보이는 이 작품은 인간의 어둠과 취약성 그 자체가 극의 중심에 놓이는 심리 드라마다. 집착과 학대라는 외부 요인뿐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한 자기혐오 등 내부 요인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잠식해 가는지, 더 정확하게는 그 부정적인 감정에 어떻게 중독되어 가는지를 쫓는 시도가 담겼다. 

지난 4월초 공개 이후 영국과 미국 등에서 먼저 반향을 일으켰던 이 작품은 화제성이 점점 더 높아지는 슬리퍼 히트를 기록 중이며, 한국에서도 조금씩 입소문이 붙는 추세다. 

ⓒ넷플릭스 제공

사소한 친절이 열어젖힌 파국  

도니 던(리처드 개드)은 무명의 코미디언이다. 드물게 관객 앞에 서기도 하지만, 주로 그가 있는 무대는 바텐더로 일하는 동네 펍이다. 어느 날 이곳에 거구의 중년 여성 마사(제시카 거닝)가 들어선다. 침울한 표정에 곧 눈물을 쏟을 듯한 마사를 불쌍하게 여긴 도니는 따뜻한 차를 마실 것을 제안한다. 돈이 없다는 말에 도니가 한 행동은 무료로 차 한 잔을 내주는 것. 어디까지나 인간이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작은 선의다. 

즉시 기분이 밝아진 듯한 마사는 자신이 유명 변호사이며, 영국의 정계 인사들과 막역한 사이라며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순간 도니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스친다. 그런데 차 한 잔 사 마실 돈이 없다고? 

다음 날부터 마사는 펍에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는다. 각종 회의와 업무로 바쁘다는 마사가 펍에 와서 온종일 하는 일이라곤 도니를 쳐다보고 말을 걸며 시끄럽게 웃는 게 전부다. 어느덧 마사는 도니를 ‘아기 순록(Baby Reindeer)’이라 부르고 있다. 

동시에 도니의 메일함에는 마사가 보낸 메시지가 하루에도 수백 통씩 날아들기 시작한다. 혼자만의 들뜬 오해, 저속한 농담 등이 온갖 오타로 타이핑된 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메시지는 명백한 사실 하나를 가리키고 있다. 도니를 향한 마사의 스토킹이 시작됐다는 것. 스마트폰이 아닌 피처폰을 쓰는 마사가 보낸 메시지 끝에는 소름 끼치게도 언제나 같은 문구가 붙어있다. ‘나의 아이폰에서 보냄(sent from my iphone)’. 

이메일 4만1071통, 음성 메시지 350시간, 트윗 744개, 페이스북 메시지 46개, 손편지 106페이지, 순록 장난감과 수면제를 포함한 다양하고 기괴한 선물들. 4년 반 동안 이어진 스토킹에 시달린 끝에 피해자에게 남은 목록이다. 그리고 이는 《베이비 레인디어》의 크리에이터이자 주인공 도니를 연기하는 리처드 개드가 실제로 받은 것들이다. 이 이야기는, 그가 겪은 실화다. 

2019년 리처드 개드는 스코틀랜드의 예술 축제인 에든버러 페스티벌 프린지에서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Monkey See Monkey Do》를 공연했다. 직접 받았던 음성 및 텍스트 메시지를 일부 활용했지만,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 스토킹 가해자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은 의자로 대체해 연기한 1인극이었다. 직접 겪은 일이기에 발생하는 당사자의 구체성은 이 공연의 순도 높은 진심을 보장했다. 넷플릭스 작품 《베이비 레인디어》는 공연 당시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리처드 개드가 넷플릭스와 손잡고 시리즈로 다시 각색한 작품이다. 

사연을 극화하고 영상으로 옮기면서 이야기의 복잡성을 단순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베이비 레인디어》의 가장 큰 도전이자 좋은 야심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의 강점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거대하게 자리한 회색지대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나온다. 트라우마를 비롯한 정신 건강 문제는 주인공의 상태라기보다 작품의 핵심 동력이다. 수치심과 자기혐오, 회피와 합리화, 연민과 외로움, 실수와 좌절에서 비롯되는 절망. 인간을 살게 하는 게 아니라 속수무책으로 망가뜨리는 부정적 면모들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이 시도는, 일상을 공유하는 가상의 공간에서조차 최상으로 화려하고 멋진 상태만 드러내려는 기이한 인정 욕구의 시대에 찾아온 귀한 돋보기다. 

 

폭력이 하는 일 

애초에 스토킹 범죄를 신고하면 될 일 아닌가? 물론 극 중 도니도 시도했던 방법이다. 심지어 도니가 경찰서를 방문하는 것이 시리즈의 문을 여는 첫 장면이다. 그러나 명백한 불안 증세에도 도니의 설명은 어딘가 불충분하며, 이를 받아들이는 경찰의 태도 또한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 도니가 내미는 이메일 내용 같은 증거가 딱히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는 범죄의 남성 피해자인 탓에 성별 편견에도 시달려야 한다. ‘이 정도 위협’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은근한 핀잔과 자책.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의 기준에 미달한다는 자체 평가를 내린 도니는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에 소극적이다. 

더 큰 문제는 심리적 요인이다.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마사가 도니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그 구체적 양상도 보지만, 점점 더 먼 과거 속 도니의 기억을 공유하며 폭력과 학대가 한 사람에게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그 결과를 본다. “이건 학대가 하는 일이에요. 학대는 저를 온갖 이상한 인간들의 반창고로 만들었어요. 그들은 이 벌어진 상처의 냄새를 맡죠.” 마사를 만나기 전에 당했던 성적 학대의 경험은 도니를 자학의 늪으로 몰아넣고, 비뚤어진 인정 욕구는 건강한 애정관계를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든다. 자기혐오에 중독된 상태로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갈구하던 도니는 마사를 두려워하고 경멸하는 동시에 원하고 이용한다. 

범죄 생존자의 심연은 ‘피해자다움’이라는 단순한 논리로만 존재할 수 없다. 그런 논리라면 《베이비 레인디어》에서는 피해자다움의 전형성에서 탈락할 만한 상황들만 가득하다. 자신을 학대한 사람과의 관계를 온전히 끊어내지 못하는 도니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상상 속에서 마사를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 대하는 도니의 심리를 인정할 수 있는가? 나아가 이 모든 것이 도니가 당한 스토킹 범죄 피해 사실의 진위를 가릴 수 없는 근거가 되는가? 

《베이비 레인디어》는 결코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약화하거나 가해자를 옹호하진 않지만, 인물들을 이해 불가한 행동 묘사의 반경에 가두지만은 않는다. 그보다는 두려움과 회피가 만들어내는 취약한 거짓말들의 순간을 포착하는 과감한 용기를 낸다. 그 결과 이 작품은 스토킹과 자학의 굴레에서 살아남은 자의 생존이자 회복의 ‘진짜 기록’이 된다. 여기에 법적 공방의 언어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히려 그 사각지대에 가려져있던 가장 중요한 질문, ‘폭력은 무슨 짓을 하는가’의 결과를 목격하게 할 뿐이다. 그것은 학대의 순환을 조용하고도 섬뜩하게 경고하는 마지막 장면이 이 시리즈의 가장 완벽한 결말인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