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라’에 딜레마 빠진 北...대응하자니 돈 잃고, 무시하자니 신뢰 잃어
북한이 한밤중에 오물이 담긴 풍선을 전국에 대량 날려 보냈다. 다음날 새벽에는 미사일 발사와 전파 교란 공격도 이어졌다. 이례적으로 강경한 이번 동시다발적 도발은 앞서 우리 측이 대북전단(삐라)를 살포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비대칭 전력’으로서 대북전단이 지닌 효과를 방증한 셈이다. 게다가 북한으로서는 여기에 대응해도, 침묵해도 손해를 피하기 힘든 상황이다.
국군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5월28일 밤부터 북한에서 가축 분뇨와 담배꽁초, 폐건전지, 천조각 등을 채워 넣은 풍선이 날라왔다. 29일 오후 4시 기준 전국에서 발견된 오물 풍선은 260여개다. 1회 기준 역대 최대 규모의 ‘풍선 도발’이다. 또 군이 오물 풍선을 발견한 지 몇 시간 뒤인 29일 새벽에는 서해 지역에서 위치신호 등을 방해하는 GPS 전파 교란이 확인됐다. 이는 30일 아침에도 이어졌다.
뿐만 아니다. 30일 아침에는 북한이 동해상으로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로 추정되는 비행체 10여 발을 쐈다. 군은 이를 이동식 발사대에서 발사된 초대형 방사포로 보고 있다. 올해 들어 여섯 번째 미사일 도발인데, 이처럼 10발 이상을 쏜 것은 윤석열 정부에서 2022년 11월 이후 두 번째다. 규모와 감행 간격을 고려할 때 가히 ‘역대급’ 도발이다.
오물 풍선에 미사일·GPS 교란까지 ‘역대급’ 도발
배경은 명백하다. 앞서 북한은 26일 국내 민간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에 맞대응하겠다며 “수많은 휴지장과 오물짝들이 곧 한국 국경 지역과 종심 지역에 살포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어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29일 담화문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한국 것들이 우리에게 살포하는 오물량의 몇십 배로 건당 대응할 것”이라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대북전단이 북한의 심기를 강하게 건드린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북한 수뇌부에 대한 대북전단의 파급력이 커졌음을 시사한다. 북한이 언급한 대북전단 살포를 주도한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5월30일 시사저널에 “(북한의 이번 대응은) 북한 내부가 그만큼 허약해졌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박 대표는 “요즘 북한 10~20대는 김정은 말을 안 듣는데다 휴대폰이 보급되며 정보 교류가 활발해졌다”며 “우리가 보낸 전단이 남포특별시(평양 서쪽에 인접한 항구도시) 시당 청사에 떨어졌다는데 그걸 휴대폰으로 찍어서 공유하자 난리가 났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지난 10여 년 동안 김정은을 총칼로 찔러 죽이는 전단까지 보냈는데 이번에 이렇게 오물을 보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5월10일 박 대표는 케이팝과 임영웅 트로트 등이 담긴 USB와 서울 홍보 소책자, 1달러 지폐, 대북전단 등이 담긴 풍선 20개를 북한으로 띄워 보냈다.
“몇십 배로 대응”...재정 상황 따라 부메랑 될 수도
외신도 대북전단이 일으킨 파장에 주목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강동완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인용해 “북한 주민들이 밀수된 남한 콘텐츠를 시청하려는 시도가 늘자 북한 정권은 그 어느 때보다 위협을 느끼고 있다”라며 “이념 변화와 정권을 향한 충성도 저하를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대북전단의 효과에 새삼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북한이 이번 과민 대응으로 딜레마에 빠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북한이 “몇십 배로 대응할 것”이라며 보복 발언을 한 이상, 이를 지키려면 고강도의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상당한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한국국방연구원은 북한이 작년 한 해 미사일을 쏘는 데 최대 1조3000억원이 소요됐다고 추정했다. 단거리 탄도미사일의 경우 한 발당 최대 68억원이 들어간다. 이번에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10발 이상 발사했으니 700억원 넘는 돈이 하루 아침에 날아간 것이다. 만일 북한이 재정 부담을 우려해 미사일 도발을 자제한다면 보복 발언은 엄포로 그칠 게 뻔하다. 이는 곧 북한 정권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안 통하는 ‘표현의 자유’...“北 홍보수단 바닥났다”
풍선 도발로 심리전을 감행한다 해도 대북전단에 비하면 효과는 미비하다. 김여정은 이번 오물풍선 살포를 두고 ‘표현의 자유’를 운운했다. “대한민국에 대한 삐라 살포가 우리 인민의 표현 자유에 해당하며 한국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오물풍선에 ‘표현’이라고 할 만한 전단지는 포함돼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남한에 소구력을 지닌 북한의 정권 홍보 수단이 사실상 바닥난 것’이란 지적이 제기된다. 통일부는 30일 김여정의 표현의 자유 발언을 두고 “궤변이자 자가당착”이라고 꼬집었다.
다만 풍선에 소형 폭탄이나 독가스 캡슐 등 재래식 무기를 탑재해 보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된다고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이유다. 또 대북전단에 대한 북한의 맞대응이 그 수위와 종류를 떠나 접경지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가중한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정부 또한 전력 소모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2021년 3월 ‘대북전단 금지법’이 시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렸다. 즉 현행법상 대북전단 살포를 법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일단 통일부는 30일 대북전단 살포 제재 여부에 대해 “고려해보겠다”면서도 “공식적으로 자제 요청을 하자는 입장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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