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이들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하다

  21 04월 2024

“어린 시절 그 어떤 날의 오후를, 깊이 파고들어 당신의 일부가 돼버린, 도무지 그것을 제외하고는 당신 인생을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오후를 몇 번이나 더 기억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네다섯 번 정도, 어쩌면 그 정도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린 인옥은 금강 하구(河口)에서 떠올라온 청회색의 보름달로 정지된 듯한, 윤슬이 반짝이는 수변을 걸었다. 금강을 가로지르는 황산과 세도 나루를 오가던 ‘초저녁 뱃전의 달(船月)’이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지 않았을까?”

ⓒ시사저널 이종현

‘기다림’ 시리즈의 배경은 부여와 강경역

필자는 과거 평론에서 김인옥 작가(69)에 대해 이렇게 썼었다. 4월15일 김인옥 작가의 ‘그 어떤 날의 오후’와 ‘초저녁 뱃전의 달’의 흔적을 찾기 위해 충남 강경으로 향했다. 작가의 어린 시절은 강경역과 강경성당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하다. 강경은 한국인 최초 가톨릭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첫 사목 성지다. 1961년 지어진 강경성지 성당은 뜬 배 구조의 기초 위에 첨두형 아치보로 내부를 구성한 건축적 특징을 갖는다.

작가에게 부여군 세도면과 기차역 및 성당이 있는 강경은 두 곳을 가로질러 오가야 하는, 금강 줄기처럼 평생 동안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자리 잡아왔다. 김인옥은 대학 시절, 대상을 그대로 화폭에 가져오면 재미가 없었다. 이당 김은호(1892~1979)의 작품에서 보듯 한국 전통회화인 채색화는 라인을 먼저 그리고 색을 칠하는 구륵법(鉤勒法)이 대세였으나, 그게 너무나 싫었다. 김인옥은 미리 계산된 구도와 면분할을 하지 않고 그리면서 순간순간 바꾸는 스타일을 지향한다.

예술과 인생이 어느 쪽으로 흐를지 알지 못하던 30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전반, 삶의 터전으로 잡은 경기도 양평군 항금리에 대한 기억은 이후 작업의 또 다른 강력한 모티브가 된다. 항금리로 들어가는 길은 봄이면 신록의 숲이 푸르렀고,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김인옥-김강용 부부에게 이 시절은 하얀 백지 공포 자체였다. 작업을 하지 못할 것 같아 중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중간중간 대학 강사를 하는 아슬아슬하고 두려운 시기였다.

1986년 첫 개인전 이후 두 번째인 1993년 《김·인·옥》 전시에서 순지에 수간 채색 기법으로 사물들을 차용한 게 ‘기다림’ 시리즈의 출발이다. 작품의 모티브는 시간 속으로의 여행이었다. 강경역에 내려 금강나루에서 나룻배로 건너면 미루나무 숲은 햇볕에 부서져 머리 위에서 춤을 추었다. 10여 리를 가면 산자락 아래 옹기종기 모인 마을이 작가의 고향인 부여군 세도면 가회리다. 툇마루에 앉으면 황산 들이 내려다보였다. 멀리 까만 증기기관차는 하얀 김을 뿜고 달렸고, 하루 한두 번 다니는 버스는 뒤꽁무니로 뽀얀 먼지를 일으켰다. 그 버스를 타고 어린 인옥은 상상의 여행을 떠나곤 했다.

김인옥은 초등학교 때 대전으로 이사했고, 중·고를 마친 후 서울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다. 2000년대 이후 15여 년간 김인옥은 꽃, 나비, 기차, 쿠션, 물뿌리개 등 풍경과 대상인 사물을 결합시킨다. 나비는 어린 시절 들판을 뛰어다니던 생동감, 쿠션은 안락하고 편안함의 상징이다. 차용한 풍경과 걸맞은 오브제는 김인옥 회화의 특징인 함축과 생략의 수단이다.

김인옥은 고교생 딸의 중국 유학과 동시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베이징 다산쯔(大山子) 798 예술특구에 작업실을 냈다. 남편 김강용 작가는 미국 왕래가 잦았고, 장녀는 독립했다. 작업실은 한국 작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딸의 공부가 마무리에 접어들면서 2015년 그리던 항금리로 귀환할 수 있었다.

김인옥 작품의 아우라는 작업 방식에서 연유한다. 풍경과 사물이라는 리얼리티의 재해석과 시간 속 상상의 여행이 결합된 색채와 색조가 형태와 구도를 정한다. 차용한 리얼리티를 재현하려는 본능을 억누르며 대상에 매몰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쓴다. 사방으로 열린 한옥의 창이나 문틀을 프레임으로 한 차경(借景) 너머 마음속 고향에 남겨두고 온 소녀적 자아에 이르게 된다.

작가는 한지를 세 번 겹친 삼합지 위 아교에 백반을 풀어 물에 타 도포한다. 채색 후에는 먹을 물에 풀고 호분을 섞어 평필로 바른다. 때문에 김인옥 회화는 맑고 젖어드는 느낌으로 한국 전통 채색화의 맥을 잇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항금리 가는 길》, 2023, 60.7ⅹ72.7cm 한지 위에 채색 ⓒ김인옥 작가 제공
《기다림》, 2019, 60.5ⅹ73cm, 한지 위에 채색 ⓒ김인옥 작가 제공
《기다림》, 2024, 120x120cm, 한지 위에 채색 ⓒ김인옥 작가 제공

풍경 속 버스 타고 떠나면 항구에 닿는다

‘풍경(landscape)’은 자신이 살아온 시대, 시간의 궤적을 담는다. 종전 첫 베이비붐 세대의 눈으로 본 세상은 대체로 희망보다는 절망, 분노가 넘쳤다. 김인옥은 ‘작가는 치유자’라는 소명 의식으로 절망과 고통의 리얼리티를 공고화하지 않는다. 남편 김강용은 한국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군 반열에 들어섰고, 중국 유학을 고집한 막내딸은 다음 달 결혼을 앞두는 등 김인옥 인생은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럼에도 작가는 미루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는 뽀얀 먼지 일으키는 버스를 타고 낯선 항구도시에 내려 ‘알렉산더 뒤마’호에 올라 또 다른 도시로 떠나는 10대 소녀를 상상한다. 마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1914~1996)의 자전적 소설 《연인》의 한 장면이다. 김인옥은 스스로 작업에서 치유받았듯 관객에게, 길을 잃었는지 묻고 있다. 주저 없이 ‘예’라고 답하면 길 앞으로 놀랍도록 아름다운, 자신이 지나온 풍경이 선물로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