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더스] 독일, 초인플레이션 발생 후 100년이 뉴스 공유하기본문 글자 크기 조정

  04 11월 2023

도이체 방크

1923년에 발생한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이 100년을 맞았다. 벨기에 브뤼셀의 도이체 방크 지점. 로이터=연합뉴스

각종 기념일을 통해 사람들과 국가는 과거를 기억하고 의미를 되새기며 지금의 행보가 올바른 것인지 곱씹어보는 계기로 삼는다. 한국은 현대사에서 겪은 식민지 경험과 분단, 그리고 독재 등의 뼈아팠던 과거를 통해 그러한 역사적 기념 내지는 추모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기억이 사라지고 과거로부터 배운 중요한 교훈이 퇴색해 더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올해는 독일이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모든 국민의 집단의식 속에 자리 잡은 사건이 있었던 해다. 1923년에 발생한 초인플레이션 이후 100년을 맞은 해다. 이 일은 역사가들과 사회학자들이 전후 서독의 국가 구성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지금은 희한하게도 역사 속의 일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코로나 국면 종식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물가가 급등하자 물가 안정에 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지만 관련 주제가 이전에 지니고 있던 본질적인 의미는 이미 사라졌다.

◇ 화폐 가치 급락… 우표 1장에 50억 마르크

1923년에 무슨 일이 있었나? 1871년에 탄생한 독일 제국은 금본위 제도의 마르크화를 도입했다. 그런데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제국은행은 모든 지폐의 금태환 약속을 철폐한 후 화폐의 양이 빠르게 증가해 1915년에 59억 제국마르크였던 화폐가 1918년에는 329억 마르크로 늘어났다. 동시에 부채도 증가해 1914년에 52억 마르크였던 부채가 1918년에는 1천53억 마르크가 됐다.

제국 통화의 가치가 지속해서 하락해 이전에는 영국 파운드화가 국제 기축통화 역할을 했으나 1차 대전을 계기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미국 달러화 대비 84%의 가치를 잃게 됐다.

이에 따라 이 시기 초반 수년간 매우 불안한 상황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엄습했다. 공산주의자들과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우익주의자들은 각각 권력을 차지하려고 대립했으며, 많은 국민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했고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굴욕적이며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해당 조약에 따라 독일은 기존 영토의 13%와 10%에 이르는 인구를 잃는 동시에 막대한 금액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나 독일의 산업 생산은 급격하게 줄었으며, 그로 인한 세수 감소에 따라 -전쟁 이전의 37% 수준에 불과- 독일은 전쟁 배상금 지급 불능 상황에 이르렀다.

프랑스 정부는 많은 독일 국민이 느꼈던 '강압적인 베르사유 조약'의 의무 규정들을 충족시키지 않으려고 핑계를 대는 것이라 여겼다. 1922년 말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가 독일의 주요 공업 지역이었던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당시 독일 제국 총리였던 빌헬름 쿠노는 해당 지역 노동자들에게 소극적인 저항, 또는 태업을 촉구했다.

쿠노 총리는 노동자들에게 지속적인 급여 지불을 약속했는데, 이는 상당한 양의 새로운 돈을 발행해야만 가능했으며, 그에 따라 국민 경제 측면에서 해당 화폐는 실질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화폐로 정부의 새로운 부채를 상환했으며, 1923년 5월이 되자 인플레이션은 완전히 통제 범위를 벗어났다. 통화량은 1923년 4월에 8조6천100억 마르크였는데 5월에는 17조8천400억 마르크가 됐으며, 8월에는 669조7천30억 마르크, 11월에는 4해 마르크(400 x1018)로 늘었다. 편지 1통을 부치기 위해 필요한 우표 1장 가격이 무려 50억 마르크였으며, 노동자들은 임금을 점심때 받았는데 이는 저녁이 되면 돈의 가치가 거의 소멸하기 때문이었다.

유로 화폐

초인플레이션을 겪은 독일인 상당수가 유로화 도입에 반대했었다. 로이터=연합뉴스

◇ 실업률 폭등, 중산층 몰락… 전격적인 화폐 개혁

국가 경제 차원에서 이는 재앙이었다. 가격을 통한 통제 기능이 사라지면서 국가 경제에서 물건의 수급 상황이 반영되지 못했다. 엄청나게 늘어난 통화량으로 식당 차림표의 가격도 천정부지로 뛰어 1923년 8월 이후에는 매일 음식 가격을 새로 고쳐야 했다.

해외에서 독일 경제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붕괴됐으며 실업률은 폭등해 거의 30%에 육박했다. 당시 사회보장 제도는 오늘날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미흡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중산층이 경제적 기반을 잃은 점이다. 실업가들과 부동산을 소유한 자산가들도 재산상의 손실을 보긴 했지만, 적은 소득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공무원이나 소상공인을 비롯해 영세한 이들은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현금이나 국채 등의 형태로 갖고 있다가 모든 것을 잃는 처지가 됐다. 이는 이들이 얼마 가지 않아 정치적으로 극단화되면서 국가사회주의(나치즘)가 부상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통화 정책의 책임은 당연히 제국 은행에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루돌프 하펜슈타인 총재가 중심에 있었다. 이때 하펜슈타인 총재는 제국 은행 정관에 따라 종신 총재직을 맡고 있었다. 100년 전인 1923년 11월 15일 독일의 화폐 제조 기계는 가동을 중단했으며, 1조 마르크를 1렌텐마르크로 전환하는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1923년 11월 20일 하펜슈타인이 갑자기 사망한 후 얄마르 샤흐트가 후임 총재로 취임했다. 샤흐트 총재는 취임 직후 첫 번째 내린 의사 결정으로 새로운 화폐 단위인 렌텐마르크의 환율을 당시 새로운 세계 기축통화가 된 미국 달러화에 대해 1달러당 4.2마르크로 확정했다.

전격적으로 단행된 화폐 개혁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초인플레이션은 끝이 났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생긴 국가 경제의 주름은 오랫동안 지속됐고, 초인플레이션은 모든 독일인의 기억 속에 깊게 각인됐다.

◇ 화폐 발행이 부른 가치 하락과 인플레이션

제2차 대전이 끝나고 1948년에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알프레드 뮐러-아르막이 미·영·프 3개 서방 전승국의 관리 지역(서독 지역)에서 독일 연방주 은행이 발행하는 새로운 화폐, 그리고 1949년 이후에는 독일 연방 은행에서 발행하는 화폐의 밑그림을 그릴 때 화폐 가치의 안정성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 초인플레이션을 겪고 난 후 화폐 가치의 안정성이 유지돼야만 비로소 시장 원리가 제 기능을 할 수 있으며, 특히 경쟁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독일 마르크화는 유럽에서 가장 안정적인 통화로 자리매김했으며, 유럽 통화 체계 안에서 새로운 기축통화 역할을 하게 됐다. 물론 이에 대해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의 새로운 파트너 국가들은 불만을 갖기도 했다.

전후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서는 국가사회주의(나치즘)가 남긴 상흔이 뚜렷한 상황에서 국가를 의미하는 상징물이나 애국심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신 독일 마르크화에 대한 자부심이 국가의 정체성을 표시하는 특별한 형태로 기능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독일 국민은 유로화 도입에 회의적이었으며, 나아가 많은 독일인이 유로화 도입에 반대했다. 통화 안정성을 유지해야 하는 소위 '마스트리히트 기준'의 준수와 그리스 사례와 같이 국가 채무 위기가 발생해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도 정치적 배경에서 결국 새로운 유로존 회원국으로 편입되는 사례를 둘러싼 정치적 논의가 독일에서 격렬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과거 초인플레이션을 경험했던 세대가 세상을 떠나면서 회의적인 시각은 거의 사라졌다.

2008년과 2009년에 발생한 금융 위기와 2015년에 있었던 대규모 난민 유입 사태, 그리고 2020년 이후 코로나 사태 등을 겪으면서 통화량이 다시 크게 늘었는데, 이때는 큰 문제 제기 없이 일이 진행되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을 1923년과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1914년부터 1922년 사이에 지폐 발행을 늘리기 위해 서서히 오랫동안 화폐를 찍어냈으며, 이에 따라 의식하지 못하는 와중에 화폐 가치는 절하가 진행됐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당시와 유사한 점이 있다. 러시아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발했으며, 이로 인해 식료품 및 에너지 시장에서 왜곡 현상이 생겨나면서 고난이 가시화됐다. 바라건대 역사의 교훈을 반드시 기억해 화폐를 찍어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가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킬대학교 경제학 박사 |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 2004~2006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 현재 독일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대표, 독일 비텐·헤르덱케대학교 객원교수
[독일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제공]

옮긴 이: 김영수(독일 한스자이델재단 한국사무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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