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누가 빨리 내놓나…증권가, 책무구조도 도입 ‘속도전’

  02 04월 2024

“법률에서 정한 것보다 먼저 도입한다.” “업계 최초 도입을 추진한다.” “이미 실무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달 말부터 일주일 사이 국내 대형 증권사 3곳에서 연달아 배포한 홍보 자료의 내용이다. 도입 대상은 ‘책무구조도’다. 각사가 책무구조도를 선제적으로 도입하기로 했고, 이를 통해 내부통제 강화에 나섰다는 점을 강조하는 문구다.

최근 증권가에선 책무구조도 선제 도입을 통해 내부통제 ‘모범 사례’에 들기 위한 분주한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관련법 개정으로 책무구조도 마련이 의무화된 뒤로 속도 경쟁에 돌입한 상태다. 홍콩 주가연계증권(ELS) 사태를 포함한 내부통제 부실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당국의 눈치를 보는 게 불가피하다는 해석이다.

증권가에선 내부통제 강화 움직임에 발맞춰 선제적인 책무구조도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CEO에 책임 물을 수 있게”…책무구조도 도입 촉구하는 배경

2일 금융투자업계 분위기를 종합하면, 주요 증권사는 대부분 책무구조도를 마련하기 위한 채비에 나섰다. 책무구조도란 임원들의 책무를 구조화한 것으로, 특정 업무의 최종 책임자를 특정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다. 지난해 금융회사 지배구조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금융투자업계는 의무적으로 책무구조도를 도입해야 한다.

책무구조도는 2020년부터 라임‧옵티머스,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등 내부통제 부실 이슈가 연달아 터져 나온 뒤로 필요성이 대두됐다. 기존 금융사지배구조법엔 내부통제 기준 ‘마련’ 규정은 있었지만 ‘준수’ 의무는 없었다. 이에 금융당국의 중징계 처분을 받은 일부 금융권 최고경영자(CEO)가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사법적 처벌을 비껴갔다. 개정된 법에 따라 책무구조도가 마련되면 내부통제 부실의 책임을 묻기 쉬워진다.

책무구조도의 파급력을 고려해 업권 별로 도입 시기는 다르다. 금융지주는 오는 7월까지 책무구조도를 마련해야 하는데,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의 증권사는 1년의 유예 기간을 적용받는다. 그 외 증권사는 오는 2026년 7월 이내 제출로 정해졌다.

15개월의 유예 기간이 남았지만 증권가가 선제적 움직임을 보이는 배경엔 ‘신뢰 회복’이 있다. 지난해 4월 SG증권발 차액결제거래(CFD) 관련 대규모 주가 폭락 사건 이후 라덕연 주가조작 사건, 영풍제지 미수금 사태, 홍콩H지수 ELS 불완전 판매 논란 등 악재가 끊이지 않았다. 이 같은 내부통제 리스크로 여론의 눈총을 받게 된 증권사로선, 이미지 쇄신을 위해 선제적 움직임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당국도 연일 책무구조도 도입을 압박하고 있다. 전날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시중은행장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번 ELS 사태 상황에서 책무구조도가 있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실효성 있는 도입을 당부했다. 김 위원장은 “책무구조도가 법령에 따라 마지못해 도입하는 제도가 아니라 내부통제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을 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금융위원회 제공

증권가 달군 키워드는 ‘내부통제 강화’…대형 증권사가 선도

증권업계에서 당장 책무구조도 도입이 가시화한 것은 신한투자증권이다. 신한투자증권은 지난해 9월 책무구조도 컨설팅에 착수해 올해 1월 준법경영부를 신설했다. 이달 중으로 회계 및 법무법인의 자문을 통해 책무구조도를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타임라인대로 이달 책무구조도가 도입되면 증권업 최초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NH투자증권도 지난해 정기 조직개편을 통해 책무구조도 도입에 박차를 가했다. 내부통제 전문가들로 구성된 준법기획팀을 준법감시인 직속 팀으로 신설해 직무 분석 등 작업을 시작했고, 지난 1월에는 대표이사를 포함한 전 임원들이 참여하는 행사에서 책무구조도 도입 관련 설명회를 열기도 했다.

KB증권의 경우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과 KB증권 전 본부 부서가 참여하는 ‘내부통제 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임원 및 부서장 대상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본격적으로 내부통제 제도 개선 프로젝트 추진을 시작했다.

책무구조도 도입 시기가 2026년까지로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중소형 증권사도 예외는 아니다. 한양증권은 최근 준법감시인 산하에 준법경영혁신부를 신규 설립해 전사적 내부통제 프로세스를 진단하는 역할을 맡겼다. 이밖에 대형 증권사에 해당하는 한국투자증권과 키움증권 등도 책무구조도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업계 관계자는 “증권사를 포함해 금융투자업계 전반이 내부통제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 분위기”라며 “금융당국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선제적 도입 경쟁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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