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조달청 비축물자 관리 시스템에 구멍 뚫렸다

  14 06월 2024

조달청이 2022~23년 부산 비축기지에 보유 중이던 탄산리튬을 민간 업체에 빌려주고 상환받는 과정에서 엉터리 물품을 전달받고도 9개월 동안 몰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해당 업체가 상환할 탄산리튬 성분을 표시한 시험성적서뿐 아니라 원산지증명서까지 허위로 제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로 확인될 경우 적지 않은 논란이 예상된다. 국가의 핵심 원자재를 관리하는 조달청의 비축물자 관리 시스템에 구멍이 뚫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23년 9월13일 김윤상 당시 조달청장(가운데)이 부산 비축기지를 방문해 알루미늄, 구리 등 비축 중인 원자재와 보관시설 등을 살펴보고 비축사업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뉴시스

그날 조달청엔 무슨 일이 있었나

시사저널이 받은 내부 제보와 관련 인사 인터뷰, 입수 문건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해 보면, 사건은 2022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차전지 핵심 소재인 수산화리튬을 생산하는 L사는 당시 칠레산 저순도 탄산리튬(99.2%) 290톤을 부산지방조달청에서 빌렸다. 최대 9개월간 탄산리튬을 빌리는 조건으로 회사가 지급한 돈은 184억원의 보증금과 이자였다. 코스닥 상장사이자 L사의 관계회사인 H사가 이 계약의 지급보증을 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L사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회사는 공업용 저순도 탄산리튬을 이차전지나 전고체 배터리에 사용하는 고순도 수산화리튬이나 탄산리튬으로 정제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당시 리튬 가격이 급상승하고, 원료 또한 구하기 쉽지 않았다. 조달청이 보유하고 있던 비축물자를 빌려 영업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및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가 원산지인 배터리급 탄산리튬(99.5%)으로 반환하는 게 계약 조건이었다. 실제로 L사는 2023년 9월11일부터 15일까지 부산지방조달청에 계약한 탄산리튬 290톤을 모두 반환했다. 주요 언론은 조달청이 수입산 탄산리튬 일변도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국내산 배터리급 탄산리튬을 비축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반환한 탄산리튬 중 일부가 계약 내용과 다른 저순도 탄산리튬일 수 있다는 점이다. L사는 2023년 9월11~15일 충남 공장에서 부산 비축기지까지 트럭에 실어 탄산리튬을 상환했다. 부산 비축기지에서 대기 중이던 L사 직원이 현장에서 물품을 직접 인수받고 서명까지 했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이 출고전표와 인수증을 살펴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9월12일까지 입고된 탄산리튬은 모두 99.5%의 고순도 물품이었다. 하지만 9월13일부터 입고된 탄산리튬에는 99.1~99.2%의 저순도 탄산리튬이 상당 부분 섞여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취재 과정에서 만난 L사의 내부 관계자는 “반환된 290톤의 탄산리튬 중 10%가 기준 미달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회사는 조달청에서 빌린 290톤의 탄산리튬 중 260톤을 수산화리튬으로 바꿔 외부에 판매했다. 나머지 30톤은 조달청에서 넘겨받은 물품을 그대로 박스만 바꾸는 이른바 포대갈이로 상환한 것으로 안다”면서 “이 과정에서 회사 차원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6월11일 L사 내부 관계자가 탄산리튬 부정 상환 관련 근거 자료를 제시하면서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조달청 “과거 발행된 서류에는 문제 없어”

하지만 조달청은 이 같은 내용을 9개월이 지나도록 모르고 있었다. 탄산리튬 상환 당시 L사가 받은 인수증만 확인해도 계약 내용과 다르다는 점을 조달청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이와 관련해 부산지방조달청 관계자는 “내부 규정상 비축물자를 상환받을 때는 공인 국가기관이 발행한 시험성적서와 검정보고서를 제출받는다”면서 “L사와 체결한 계약서의 제9조(상환 방법)와 제10조(상환 절차)에도 이렇게 나와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과거에 발행된 서류를 확인해 보니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비축물자 관리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기자의 지적에 대해서도 이 관계자는 “수백 톤에서 수천 톤에 이르는 물자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서 “공인 국가기관의 증명서가 있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법으로 처벌할 일이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환 시스템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시험기관은 상환 물품 중 일부만 샘플링해 검사하는 만큼, 조달청의 눈을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L사가 의뢰한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의 시험성적서에는 ‘시험결과는 의뢰자가 제시한 시료 및 시료명에만 한정된다’고 언급돼 있다. 앞서 언급한 L사 내부 관계자는 “비축기지 현장에서 L사가 발급한 인수증만 확인해도 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부정 상환을 막기 위해서는 전수조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임의로 샘플링을 하는 표본검사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조달청은 당시 포항산업과학연구원과 함께 한국광해공단의 시험성적서도 받았다”면서 두 기관의 시험성적서에 표시된 성분이 달랐음에도 조달청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시스템의 문제다”고 꼬집었다.

더군다나 L사의 탄산리튬 상환이 한창이던 9월13일은 김윤상 당시 조달청장(현 기획재정부 2차관)이 부산 비축기지를 직접 방문해 원자재 보관시설 등을 살펴보고 비축사업 현황을 점검할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비축물자 관리에 허점이 노출됐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이차전지 핵심 원료인 탄산리튬은 순도가 중요하다. 조달청을 믿고 순도가 다른 탄산리튬을 빌린 업체의 경우 생산시설 고장과 제품 불량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어떤 식으로든 제기된 의혹을 확인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L사의 탄산리튬 상환을 둘러싼 의혹은 이뿐만이 아니다. 부산지방조달청은 2022년 12월 L사와 비축물자 대여·상환 계약을 맺으면서 상환하는 탄산리튬 290톤의 원산지를 ‘미국 및 미국과 FTA를 맺은 국가’로 한정했다. 전기차 배터리의 부품 또는 핵심광물이 해외 우려국(중국·러시아·이란·북한 등)과 관련돼 있을 경우 전기차 세액공제에서 제외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LA) Section 30D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L사는 상환을 앞둔 9월초 탄산리튬 상환계획서를 부산지방조달청에 제출했다. 이 계획서에는 원산지(포괄)확인서가 포함돼 있었다. 시사저널이 확보한 L사의 확인서에 따르면, 상환된 탄산리튬의 원산지는 5곳이다. 미국을 포함해 칠레, 캐나다, 페루, 호주 등으로 모두 미국과 FTA를 체결한 나라이기 때문에 서류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L사는 당시 모 대기업 계열인 I사로부터 원료를 공급받아 탄산리튬을 정제했다. I사가 L사에 보낸 원산지(포괄)확인서에 표시돼 있는 국가는 모두 18곳이다. 이 중에는 터키와 인도, EU, 뉴질랜드, 베트남, 영국 등도 포함돼 있다.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은 국가다. 심지어 미국이 해외 우려국으로 지목한 중국도 원산지증명서에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조달청에 보낸 원산지(포괄)확인서에는 이들 국가가 모두 빠져있었다는 점에서 의문이 일고 있다.

조달청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부산지방조달청 관계자는 L사에 메일을 보내 원산지를 명확히 표기할 것을 주문했다. 구두로는 원산지가 대한민국인데, 칠레와의 협정에 따른 서식을 사용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후에는 아무런 문제 제기가 없었다는 점에서 원산지 조작 의혹에 대한 확인 역시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L사는 부산지방조달청과의 계약에서 99.95%의 탄산리튬을 상환한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99.1%(사진)대저순도 물품도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시사저널 최준필

“비축물자 관리 시스템 손봐야”

경찰도 현재 L사의 탄산리튬 부정 상환 의혹을 내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가 조직적으로 부정행위를 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L사 직원이 경찰에 공익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현재 충남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비축물자 대여·상환 과정에 커넥션은 없었는지 등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조사 결과에 따라 파장이 일 수 있어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조달청은 이달 시행되는 공급망안정화기본법에 맞춰 비축물자 방출기준 수립 등 ‘조달청 비축사업 운영 규정·제도’를 손질할 예정이다. 위기품목 및 긴급수급조절물자에 대한 긴급방출 근거를 마련하고 공급망 위기 발생 시 비축재고 전량을 구매원가 이하로 방출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상환 시스템이 지금과 같이 허술하게 운영된다면 관련 규정을 손봐도 소용이 없다. 오히려 제2, 제3의 L사를 양산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라도 비축물자 관리 시스템을 다시 한번 꼼꼼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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