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 주관 5·18민주화운동 ‘추모식’ 엄수…“44년째 응어리진 아픔”

화창한 날씨 속에 5·18 희생자 유족회가 주관하는 5·18 민중항쟁 제44주년 추모식이 17일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엄수됐다. 이날 5·18민주묘지에는 44년째 응어리진 아픔을 지닌 유가족과 학생 등 일반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정부 주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하루 앞서 열린 추모식은 1부 희생자 제례·2부 추모식으로 나눠 열렸다.

17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유족회가 주관하는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제례는 양재혁 5·18 유족회장, 윤남식 5·18 공로자회장, 문준희 5·18 유족회 광주시지부장이 각각 초헌·아헌·종헌을 맡아 희생자들을 기렸다. 향을 피우고 향불 위에서 술잔을 세 번 돌린 이들은 그릇에 술을 부은 뒤 두 번 절하는 것으로 제례 의식을 마쳤다.

개식 선언으로 시작한 2부는 추모사·유가족 대표 인사말·광주시 낭송협회의 ‘광주의 봄을 기억하겠습니다’ 추모시 낭송·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순으로 이어졌다. 광주시낭송협회가 추모시를 낭송하자 흰 소복을 입은 오월 어머니들이 흐느끼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추모식에 참석한 지자체장들과 오월 단체 대표들은 추모사를 통해 5·18 정신이 헌법전문에 조속히 수록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기정 시장은 추모사에서 “44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5·18 특별법제정, 국가기념일 지정 등 이뤄낸 성과가 많다”며 “하지만 5·18에 대한 왜곡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이어 “가해자 없는 역사가 너무 오래 지속된 탓이다”며 “내년 45주년은 5·18 정신 헌법전문 수록을 위한 원년으로 삼아 이를 완수하겠다”고 강조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양재혁 회장은 “1980년 5월 국가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저항한 희생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었다”며 “올해에는 반드시 5·18 정신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담아 시민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정신이 헛되지 않도록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성일 광주보훈청장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는 결코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며 “오월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가슴에 되새기고 다음 세대에 계승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내빈들은 추모식을 마친 후에는 헌화·분향하며 추모 분위기를 이어갔고, 묘역으로 이동해 열사들을 참배했다. 강기정 광주시장·박창환 전남도 정무부지사·정무창 광주시의회 의장·하성일 광주지방보훈청장 등이 참석했다. 

 

유가족 마른 눈물…“내가 죽어야 아들 잃은 슬픔 끝날 것”

이날 5·18민주묘지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유족과 참배객들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제례 내내 붉게 충혈된 눈에서 눈물을 훔친 오월어머니회 회원들도 저마다의 아들·남편이 잠들어있는 묘역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묘비 한편에 놓인 초상화 속 앳된 얼굴의 남편을 하염없이 바라봤고, 일부 회원은 밀려오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묘역 앞에 주저앉기도 했다.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 민주묘지에서 고(故) 김동수 열사의 어머니 김병순(89)씨가 “언제까지 올 수 있을까”라고 혼잣말을 되 뇌이며 뾰족하게 자란 묘역 위 잡초를 손으로 잡아떼고 있다. 김씨는 “내가 죽어야 아들 잃은 슬픔이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정성환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 민주묘지에서 고(故) 서호빈(19·전남대 2년) 열사 묘지 앞에서 유가족들이 흐느끼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김병순(89·장성군 서삼면)씨는 장성에서 혼자 택시를 타고 한걸음에 큰아들 고(故) 김동수 열사의 묘소를 찾았다.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속으로 삭였다.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고선 “언제까지 올 수 있을까”라고 혼잣말을 되뇌이며 뾰족하게 자란 묘역 위 잡초를 손으로 잡아뗐다. 

김 열사를 ‘집안의 대들보’라고 소개한 김 씨는 “힘겨운 집안 사정을 알뜰살뜰 살피며 동생을 돌보던 자상한 아들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내가 죽어야 아들 잃은 슬픔이 끝날 것”이라고 했다. 김 열사는 1980년 5월 26일 진압군의 전남도청 점거 공격에 맞서 마지막까지 싸운 9명의 한 사람이었다. 죽을 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1980년 5월 19일 밤 계엄군의 발포로 남편 고(故) 김안부 열사를 잃은 김말옥(75)씨는 마른 눈물을 흘렸다. “살다 보니 40여년이 흘렀다”는 말로 안부 인사를 건넸고, “홀로 4남매를 키우느라 힘들었는데, 보고 싶은 마음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며 오열했다. 김씨는 남편에게 자식들이 결혼을 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묘에 한 손을 얹고는 한참을 묘에서 떠나지 못했다.

5월이 되면 당시의 아픔을 감당할 수 없어 건강이 안 좋아져 한 동안은 발걸음을 하지 못하다 오랜만에 찾은 고(故) 서호빈(19·전남대 2년) 열사의 유가족들도 흐느꼈다. 서 열사는 열흘 항쟁의 마지막 날인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했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는 유가족 외에 오월 열사들을 기억하려는 하얀 국화송이를 둔 일반 참배객들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시사저널 정성환

이날 5·18민주묘지에는 유가족 외에도 오월 열사들을 기억하려는 일반 참배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5·18 왜곡 사례가 이어지자 역사교육을 하기 위해 찾은 교사·초등학생, 5·18에 대해 최근에 알게 된 외국인들은 묘역을 둘러보고 헌화했다. 

담임 선생님 인솔 하에 전남 광양에서 왔다는 옥룡초등학교 6학년생 박아무개 군은 “사회 과목 시간에 민주화 단원에서 5·18에 대해 배워 와보고 싶었다”며 “학교로 돌아가면 5·18은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친구들에게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부터는 광주 동구 금남로 일대 등 도심 곳곳에서 오월풍물굿과 민주평화대행진, 오월시민난장, 전야제 등 행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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