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新학군지 떠오른 대전·세종…초2 엄마도 ‘지방유학’ 문 두드린다

6월6일 세종특별자치시 새롬초등학교 앞에서 학부모들이 자녀의 하교를 기다리고 있다. ⓒ시사저널 정윤경

대한민국 사교육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사교육 1번지’의 위상을 뽐내던 서울 강남구 대치동은 혼돈에 휩싸였다. 27년 동안 굳게 걸어 잠겨있던 의과대학 정원의 빗장이 풀리면서다. 2025학년도 대학 입학전형부터 전국 의대는 전년 대비 1509명 늘어난 4567명의 신입생을 선발한다. 주목할 점은 늘어난 의대 입학 정원이 비수도권 의대에 쏠렸다는 것이다.

비수도권 의대는 해당 지역 수험생에게 혜택을 주는 ‘지역인재전형’ 선발 규모를 대폭 늘렸다. 이 때문에 의대 진학에 유리한 비수도권으로 일찌감치 이주하는 ‘지방유학’이 새로운 입시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탈대치(탈출+대치동)’라는 신조어는 이러한 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시사저널 취재진은 대치동에 이어 신학군지로 떠오른 대전·세종 지역에 6월3~5일 사흘간 머무르며 교육 당국의 의대 증원 발표에 따른 변화상을 목격했다. 또 수험생과 학부모, 입시 컨설팅 대표, 공인중개소 소장 등 30여 명의 주민과 업계 관계자 등을 만나 의대 증원 후폭풍에 관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미 현장에서는 학원가의 변화 움직임이 뚜렷이 감지됐다. 촉각을 곤두세우는 초·중등생 자녀를 둔 가정들의 얘기도 들리고, 세종 정부청사에까지 의대 증원 여파가 미치고 있었다. 아직 뚜렷한 움직임은 없지만 부동산 시장도 기대감에 조심스레 들썩이는 분위기다.

 

부산에서 대전으로 이사…아빠는 직장까지 옮겼다

“지방유학이요? 매력적인 얘기죠. 자식 의대 보내려면 대치동 벗어나는 것쯤이야 뭐….”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만난 한 학부모의 말이다. 초등학교 1·3학년생 자녀 둘을 둔 학부모 박아무개씨(43)는 지금 지방유학을 고민 중이다. 박씨는 “중학교 때 전학하면 아이들이 적응하지 못할까 봐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 전후를 골든타임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이영기군(가명·15)은 얼마 전 가족과 함께 대전으로 이사 왔다. 지역 연고는 없었다. 목적은 오직 이군의 의대 진학이었다. 이군의 아버지는 직장을 옮겼고, 어머니는 학원가에 인접한 아파트를 계약했다. 중학교 3년 동안 최상위권에 도달하지 못했던 이군은 “대전이 상대적으로 내신 성적을 잘 받을 수 있는 지역”이라고 말했다. 지역인재전형으로 갈 수 있는 의대가 충청권 내에 6곳이 있다는 점도 고려 요소였다고 한다.

6월5일 대전 서구 둔산로에 위치한 의대학원 현판 ⓒ시사저널 임준선

2028학년도 대입부터는 중·고교 6년을 비수도권에서 나와야 지역인재전형에 지원할 수 있다. 부산에서 중학교를 다닌 이군은 대전으로 이주해도 비수도권 내 이동이기 때문에 지역인재전형 대상이 된다. 반면 수도권에서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들은 적어도 중학교 입학 전인 초등학교 5·6학년 때 비수도권으로 이사해야 지역인재전형에 지원할 수 있다.

대전 지역 입시 컨설팅 학원에는 초등 유학을 문의하는 전화가 빗발친다고 한다. 대전 서구의 입시 컨설팅 업체 파피루스입시컨설팅 오경진 대표는 “최근 대전 학부모를 상대로 의대 증원에 관한 입시설명회를 열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에서 내려온 학부모도 있었다”고 했다. 이어 “직접 참석할 여건이 안 되는 학부모는 화상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지방유학을 문의한 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2~4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라고 한다. 이들은 주로 ‘자녀를 의대 보내려면 어느 지역에 가야 유리하나’ ‘우리 아이도 갈 수 있느냐’ 등을 묻는다고 했다.

지방유학을 고심하면서까지 의대 입학에 목매는 이유는 증원으로 인해 합격선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수시전형으로 의대에 가려면 8과목 중 6과목 이상에서 1등급이 나와야 했다. 나머지 두 과목도 2등급 아래로 내려가면 안 됐다. 그야말로 최상위권 학생들만 의대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의대 입학 정원이 늘어나면서 교육계에선 8과목 중 절반만 1등급을 받아도 의대에 합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오경진 대표는 “반에서 3~4등도 의대에 합격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아이들과 상담해 보면 예전엔 상위권 학생들 위주로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희망했다면, 요새는 성적 상관없이 일단 ‘의대 갈래요’ 얘기부터 한다”고 전했다.

대전 수험생들 사이에서도 의대 증원은 단연 화두다. ‘6월 모의고사’로도 불리는 2024년 전국연합학력평가를 마치고 나온 충남여고 학생들은 하나같이 의대 증원 소식을 반겼다. 정아무개양(18)은 ‘의대 입학 정원이 증원되고 나서 분위기가 어떤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박이죠, 대박”이라며 반색했다. 정양은 “쉬는 시간, 점심시간은 물론이고 수업시간에도 선생님이랑 어떻게 하면 의대에 갈 수 있는지 얘기해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아무개양(18)도 “예전에는 의대라면 쳐다도 못 봤거든요. 근데 의대 증원이 확정되니까 2등급대 애들까지 ‘혹시 나도?’라고 기대해요”라며 깔깔 웃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교사 임아무개씨는 “아이들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고 설명한다”며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보라고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 빠르게 여름방학 의대 준비반에 등록한 학생들도 있었다. 학생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옥에 갇혀서 하루 종일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공부만 하는 곳”이다. 아침 7시에 수업이 시작돼 저녁 10시에 끝난다고 한다. 오경진 대표는 “학부모가 주변 오피스텔을 방학 기간만 임차해 학생들이 이곳에서 숙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치동 가려다 그냥 대전 정착”…세종 공무원, 서울 발령도 꺼려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 입성을 고려했던 충청 학부모들도 지역에 정착하는 분위기다. 대전 서구 한밭초 1학년생 하교 시간에 만난 학부모 심아무개씨(45)는 “애들 교육 때문에 대치동에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남편에게 물어봤는데 안 가길 정말 잘했다”며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대전에서 쭉 살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초등학교 2학년생 딸을 둔 김아무개씨(41)도 “대치동에 살던 가족이 이번에 충청도로 내려온다고 들었다. 아이가 어려 혼자 보낼 수 없으니 온 가족이 총출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세종청사 등 공무원이 밀집한 세종 지역도 서울 발령을 희망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자녀 입시를 고려하면 지방에 머무르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세종 시내 학군지인 새롬동에서 컨설팅 학원 오라클에듀를 운영하는 강성준 대표는 “컨설팅을 받는 학생들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부모님이 세종으로 발령을 받아 함께 내려온 경우가 많다”며 “자녀의 중학교 입학 시기에 맞춰 다시 서울로 이사하려고 했던 학부모들도 세종시를 선호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대치동 학원들이 의대 입학 수요를 겨냥해 비수도권으로 옮겨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대형 입시학원과의 경쟁과 높은 임대료가 부담스러운 대치동보다 비수도권 학원 운영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강성준 대표는 “이례적으로 입시가 바뀐 상황에서 학원 원장들도 고민이 많다”며 “대형 재수학원을 세종시에 짓겠다는 원장도 있고, 앞으로 이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모습 ⓒ시사저널 박정훈

지역 부동산 시장도 반색…“당장은 뚜렷한 움직임 없어”

고민 없이 의대 증원을 반색하는 업계도 있다. 부동산 시장이다. 세종시 새롬동에서 7년째 공인중개소를 운영해온 이수정 소장은 “최근 유치원생 자녀를 둔 젊은 엄마, 아빠가 ‘지금 집을 사야 된다고 들었다’며 아파트를 보러 왔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의대 진학을 위해 엄마와 아이는 세종으로 이사하고 아빠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기러기 아빠’도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집값이 오르는 등 가시적 변화는 당장 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전 시내 학군지 둔산동에 있는 공인중개소 이아무개 소장(59)은 “뉴스를 보고 ‘충청 지역 부동산이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큰 영향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수정 소장도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아 당장 뚜렷한 움직임은 없다”면서도 “지역인재전형에 ‘비수도권 6년 거주’가 명시돼 있어 학세권 아파트들의 매매 문의는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물론 기대감만 있는 건 아니다. ‘의대 쏠림’으로 인해 이공계 인재가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존재했다. 대전 유성구 KAIST(한국과학기술원) 재학생 이아무개씨(25)는 “R&D 예산 삭감 등으로 이공계가 이리저리 시끄러운데 의대 열풍까지 더해지니 예전보다 인기나 경쟁률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답답함을 표출했다. 경기 안성의 한 기숙학원 이사장은 “이미 올 초에 의대 진학을 노리고 KAIST를 자퇴한 학생이 찾아온 적이 있다”고 했다.

KAIST에 따르면, 지난해 자퇴와 미복학 등으로 중도 탈락한 학생은 130명에 달했다. 종로학원은 KAIST를 포함한 4개 이공계 특성화대학의 중도 이탈자를 총 268명으로 집계했다. 전년(187명)보다 43.3% 늘어났다. KAIST 측은 “자퇴 원인을 분석하지 않아 이유는 알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입시 업계는 의대 증원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6월5일 대전시 서구 문예로에 위치한 파피루스입시컨설팅 사무실에서 오경진 대표(맨 왼쪽)가 입시 컨설팅을 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또 의대 증원으로 촉발된 지방유학이 ‘서울 쏠림’ 현상까지 해결하진 못할 것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비수도권 의대를 졸업하면 결국 다시 서울로 올라갈 것이란 관측 때문이다. 특히 연고 없이 의대 입학만을 위해 서울을 떠난 학생들일수록 유턴하는 경향이 짙어질 수 있다. 의대를 목표로 삼은 고등학교 3학년생을 자녀로 둔 김아무개씨(43)는 “엄마들 얘기를 들어보면 비수도권 의대를 졸업하고 ‘지방에 남겠다’는 소신 있는 학생은 많지 않다”고 전했다.

의사 수가 늘어나면서 학벌주의 폐단이 심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의사 면허 유무보다 수도권 의대냐, 비수도권 의대냐를 따지게 될 것이란 얘기다. 올해 서울대 이공계에 합격한 김아무개씨(19)는 입학과 동시에 휴학계를 내고 의대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목표는 수도권 의대다. 김씨의 어머니 김현주씨(55)는 “옛날에는 ‘의대면 땅끝도 괜찮다’였는데 이제는 지방대 의대 가느니 수도권 약대를 간다는 분위기”라며 “수도권 의대 학생도 이번 기회에 다시 수능 쳐서 ‘빅5’ 대학에 들어가려 할 정도”라고 말했다.

의대 진학의 청사진을 그리는 시기가 빨라지면서 아이들의 심리적 부담도 커질 수 있다. 세종 새롬초 정문 앞에서 만난 초등학교 1학년생 학부모 김아무개씨(40)는 “교육열이 높은 학부모들은 자녀를 국어·영어·수학 학원에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빈 시간에 공부방까지 등록해 독서를 시키기도 한다”며 “너무 어릴 때부터 공부에 대한 압박을 주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걱정했다. 오경진 대표도 “진로와 관련된 탐색활동을 하지 않고 공부만 시키면 아이들은 맹목적으로 공부만 하게 된다”며 “지역인재전형이 확대됐다고 할지라도 너무 성적에만 급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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