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페미니즘·한국말까지…판빙빙 변신 빛나는 영화 '녹야'세 줄 요약이 뉴스 공유하기본문 글자 크기 조정

  27 10월 2023

영화 '녹야' 속 한 장면

[퍼스트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차장님. 그 초록 머리 여자애, 진짜 문제 있어요."

젊은 중국인 여자가 어눌한 발음으로 이렇게 말하더니 급하게 짐을 싼다. 이마에는 갓 생긴 피딱지가 앉았고 화장기도 거의 없는 꾀죄죄한 모습이다. 낡은 재킷과 허름한 집은 여자의 궁핍한 처지를 대변한다.

한슈아이 감독이 연출한 영화 '녹야'는 중국 톱스타 판빙빙의 연기 변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인천항 여객터미널 검색대에서 일하는 진샤 역을 맡은 판빙빙은 데뷔 후 처음으로 긴 분량의 한국어 대사를 소화한다. 여성 간의 연대라는 페미니즘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지고 동성애 연기도 선보인다.

외모 역시 180도 변했다. 한국 팬들에게 익숙한 레드카펫 위 화려한 판빙빙은 온데간데없다. 영화 속에서 늘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는 그는 피부 잡티나 다크 서클도 거의 가리지 않는다.

진샤는 극 초반부까지 한국인 남편에 이끌려 자기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여성으로 묘사된다. 판빙빙이 중화권 드라마·영화에서 주로 연기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의 모습과 대조된다.

영화 '녹야' 속 한 장면

[퍼스트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진샤는 미스터리한 20대 한국 여자 '초록 머리'(이주영 분)와 함께하고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터미널에서 우연히 만난 초록 머리는 진샤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인물이다.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뱉고 모험도 즐긴다.

진샤는 막무가내로 자기를 따라오는 그를 말리지 않는다. 초록 머리에게 마약이 있다는 걸 안 뒤 잠시 놀라기는 하지만, 1천만원을 주겠다는 그의 말에 마약을 같이 운반하기로 한다.

둘은 크고 작은 위기를 모면하면서 점차 가까워진다. 남편(김영호)으로부터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는 진샤와 남자친구에게 이용당하기만 하는 초록 머리 사이에 동질감과 연대 의식이 싹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미묘한 성적 긴장감도 생기려는 찰나, 초록 머리가 진샤를 구해주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믿고 의지하게 된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모를 감정을 안은 채 둘은 무사히 마약을 팔 수 있을까.

영화 '녹야' 속 한 장면

[퍼스트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 영화는 판빙빙이 2018년 탈세 논란으로 중국 내에서 사실상 활동이 금지된 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홍콩 제작사에서 만든 이 영화로 우회적으로나마 배우 인생 2막을 열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에 초대되며 글로벌 팬들과도 오랜만에 만났다.

판빙빙은 쉬는 동안 공력을 차곡차곡 모았다가 터뜨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호연을 펼친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나약한 여자에서 젊은 남자에게 대담히 맞서는 전사로 차츰 변해간다.

영화 자체는 올드함과 트렌디함 사이 어딘가에 있다.

여성 간 연대로 남자의 구속에서 벗어난다는 스토리는 페미니즘 영화에서 많이 봐온 이야기다. 일부 대사는 다소 직접적이어서 멋이 떨어지는 면이 있다.

이주영이 맡은 초록 머리는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프랑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레아 세두가 연기한 엠마를 떠올리게 한다. 초록 머리가 진샤에게 왜 다가가고, 진샤는 왜 그를 받아주는지에 대한 개연성도 부족한 편이다.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촬영된 야경은 생경하면서도 멋스럽다. 환상적인 분위기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까지 얹어지며 두 사람의 일탈을 더 아름답게 그린다. 판빙빙과 이주영이라는 뛰어난 두 배우가 포장마차에서 마주 앉아 떡볶이를 먹으며 소주를 들이켜는 장면을 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11월 1일 개봉. 92분.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 '녹야' 속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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