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논란, 과연 원작 파괴나 역사 왜곡 때문이었을까

  03 02월 2024

잘나가던 《고려거란전쟁》 논란의 핵심은 원작 파괴도, 역사 왜곡도 아니다.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은 극 초반만 해도 큰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드라마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혹평으로 바뀌었다. 원작 파괴, 역사 왜곡 논란이 이어지더니 급기야 트럭 시위와 시청자 청원까지 등장했다. 무엇이 이런 일파만파의 논란을 불러일으켰을까. 

ⓒKBS 제공

《고려거란전쟁》 논란, 무엇이 문제였나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은 시작과 함께 양규(지승현)가 40만 거란 대군과 맞서 싸운 흥화진 전투를 다양한 장면으로 그려내면서 호평을 받았다. 강감찬(최수종)의 거짓 친조를 내세운 교란 작전, 양규가 결사대를 이끌고 이뤄낸 곽주 탈환, 갑작스레 황위에 올라 조금씩 성장해 가는 현종(김동준)의 이야기에 시청자들은 새롭게 시작된 KBS 대하사극의 달라진 면모에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거란군이 물러간 후 재침공 전까지의 기간 동안, 현종이 호족들의 권력을 혁파하기 위해 개혁을 단행하는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시청자들의 반응은 혹평으로 바뀌었다. 거란의 재침공이 벌어질 위기 속에서 이런 과격한 개혁을 독불장군처럼 밀고 나가는 현종의 모습은, 현실을 모르고 이상만 추구하는 군주로 그려졌다. 결국 강감찬과 대립한다. 개경을 떠나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멱살을 쥐려 할 정도로 분노하는 현종의 모습이 연출됐고, 더 나아가 화를 참지 못하고 말을 달리다 낙마하는 이야기까지 등장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종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원성(하승리)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이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원정왕후(이시아)와의 궁중암투까지 뒤섞이면서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애초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전쟁 속에서 이를 대비하고 버텨내며 백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은 실망했다. 

시청자들은 이 작품의 원작소설 《고려거란전기》를 쓴 길승수 작가의 블로그에 이러한 실망감을 댓글로 토로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댓글 중에는 ‘16화 보고 눈물 흘렸던 게 마치 전생 같다’ ‘드라마에서 현종에게 박진이 원한을 갖고 복수하려는 이야기 전개가 설득력이 있는지 의문’이라거나, 심지어 ‘왕이 멀쩡히 깨어있으면 그 전개를 그려낼 수 없어 억지로 재워놓은 것’ 같다면서 현종을 바보처럼 그려낸 이유를 분석한 글이 많다. 길 작가로서는 자신이 쓴 원작소설과 드라마로 방영되는 《고려거란전쟁》의 내용이 다르다는 걸 어떤 식으로든 해명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결국 길 작가는 다소 감정이 섞이긴 했지만, “현종을 바보로 그리지 말라”면서 “그건 실제 역사와도 다른 이야기”라고 선을 그었다. 

길 작가의 입장 발표는 드라마의 달라진 서사가 준 실망감과 합쳐져 원작 파괴는 물론이고, 역사 왜곡 논란까지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KBS 측은 “이 작품이 원작과 계약을 하긴 했지만 참고만 했을 뿐 그 내용과는 다른 작품”이라고 선을 그었고, 역사 왜곡에 대해서도 “길 작가가 자문을 거절해 다른 전문가의 자문을 받고 있다”고 대응했다. 이에 대해 길 작가는 “자신이 자문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고려거란전쟁》 PD의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보조작가가 할 일을 자신에게 요구해 이를 거절했더니 ‘더 나올 필요 없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면서 트럭 시위, 시청자 청원으로까지 이어지자 KBS에서는 청원에 대한 답글을 통해 ‘성군 현종의 모습을 더욱 완성도 있게 그려나가겠다’며 설 연휴를 맞아 1주간 결방할 예정이며, 그 기간을 통해 완성도 높은 작품 제작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논란은 원작 파괴와 역사 왜곡으로 나아갔지만 실상 그 전개 과정을 들여다보면, 핵심은 완성도 부족으로 재미가 없어졌다는 시청자들의 불만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원작과 리메이크작이 같을 필요는 없다. 원작의 일부만 따와 새로운 작품으로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 역사 왜곡의 문제 역시 사극을 바라보는 대중의 관점 변화와 맞물려 있다. 

과거에는 역사적 사실에 방점을 찍었다면, 지금은 상상력을 입혀 사극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겼다. 다만 KBS 대하사극의 경우는 이른바 ‘정통사극’이라는 관점이 좀 더 엄밀히 작용한다. 공영방송이라는 플랫폼의 특성 때문에 실제 역사를 극으로 본다는 지점이 대하사극의 존재 이유처럼 제시돼 왔기 때문이다. 물론 KBS 대하사극이 지금껏 엄밀한 역사만을 고집해 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면 극으로서 어느 정도의 허용은 있었다는 것이다. 

《고려거란전쟁》에서 불거진 논란은 현종을 역사와 달리 그린 지점에 대한 역사 왜곡 문제가 분명 작용한 점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본래 기대했던 작품의 흐름과 갑자기 달라진 전개(그것도 역사도 아닌 허구로 그려진)가 시청자들을 실망시킨 ‘완성도 부족’에 있었다는 걸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7회를 전후해 그려진 현종의 ‘현실을 모르는 독불장군 같은 모습’은 사극의 틀에 박힌 상투적인 설정들이다. 

특히 KBS 대하사극은 전쟁 장면 같은 스펙터클 연출에 부담을 느껴온 터라 주로 궁궐 내부에서 벌어지는 정쟁이나 궁중암투 등을 많이 담았던 전적이 있다. 이로 인해 왕의 독주와 신하들과의 갈등, 그 안에서 펼쳐지는 권력구도 변화로 이어지는데, 일종의 사극의 클리셰나 마찬가지다. 시청자들의 실망감은 현종이 실제 역사와 달리 그런 인물로 그려지는 것에서 비롯됐지만, 그 이야기가 뻔한 클리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제목에 담겨있는 것처럼 ‘전쟁’의 양상과 비극에 집중해 양규의 흥화진 전투나 곽주 탈환 작전 같은 내용들을 좀 더 많은 회차에 걸쳐 자세하게 다뤘다면 어땠을까. 또 거란군이 물러간 후 재침공 전까지의 이야기를 채우기 위해 굳이 현종이 호족들과 대립하는, 실제 역사에도 없는 내용을 넣기보다는 거란과의 외교 부분을 좀 더 강조하고, 다시 전쟁 이야기로 풀어나갔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좀 더 전쟁에 집중하려 했던 《고려거란전쟁》의 애초 기획 의도에도 부합하는 완성도 높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더불어 이런 논란도 없지 않았을까 싶다. 

이번 사안은 언제든 논란의 불씨가 존재하는 사극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응하는 대중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보여준다. 시청자들이 원했던 건 역사 왜곡보다는 애초 의도와 달리 흘러간 작품에 대한 실망감, 그러니 본래 하려던 대로 사극의 흐름을 잘 이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러한 요구의 핵심에서 벗어나 KBS 측이 한 대응은 ‘원작과는 다르다’ ‘원작자가 자문을 거부해 다른 자문을 받고 있다’는 등 다소 엉뚱한 발언이었다. 

《고려거란전쟁》 포스터 ⓒKBS 제공

원작자 및 시청자와의 소통 실패도 문제  

KBS는 원작 계약까지 하고도 원작자와의 소통에 실패했고, 더 나아가 시청자와의 소통에도 실패했다. 사극을 볼 때 시청자들은 엄밀한 역사적 사실만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극 역시 하나의 스토리라는 걸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너무 과한 사실 왜곡이 야기하는 불편함, 상투적인 허구로 인해 극의 흐름이 바뀌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현종의 독불장군 같은 호족 개혁 문제가 마무리되고, 이제 다시 전쟁이 임박해 오면서 본래 드라마가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이 처음 느꼈을 기대감을 강감찬이 이끄는 ‘귀주대첩’으로 풀어줄 것으로 보인다. 이 일련의 사태를 KBS는 무겁게 곱씹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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