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에서 예술성을 추구하는 두 가지 상반된 기조

  02 06월 2024

K팝을 지배하는 두 가지의 상반된 미학적 기조가 있다. ‘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이다. 미니멀리즘은 꼭 필요한 부분만을 남기고 간결하면서도 직관적으로 세련미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최근 몇 년간 유행 중인 ‘이지리스닝’ 사운드와 깊은 연관이 있다. 맥시멀리즘은 청각 또는 시각적인 요소를 가급적 많이 활용한다. 다소 과장되면서 화려한 작풍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소위 ‘K팝스러움’의 근간이면서 3세대 이후의 K팝에서 일관되게 드러난다.

5월27일 그룹 에스파가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첫 정규 앨범 ‘Armageddon’(아마겟돈) 발매 기념 쇼케이스에서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레트로이자 뉴트로가 된 에스파의 ‘쇠맛’

이 둘은 어느 방식이 꼭 더 낫다고만은 할 수 없다. 예술을 대하는 상반된 방향성이면서 철학이기도 하다.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대중문화 산업 안에서 각자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차별화하는 과정에서 이 둘이 활용된다. 때로는 한 아티스트가 두 가지 방법론을 뒤섞어 선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최근 이 상반된 방식을 밀어붙여 저마다의 개성으로 삼는, 그야말로 ‘방향성’이 확고한 걸그룹이 비슷한 시기에 새 앨범을 내놓았다. 바로 첫 번째 정규 앨범 《Armageddon》으로 돌아온 에스파와 더블 싱글 《How Sweet》과 《Bubble Gum》을 내놓은 뉴진스가 그들이다.

에스파는 맥시멀리즘 K팝의 대표주자다. 그러면서 그 미학적 정수를 가장 노골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그룹이다. 카리나, 윈터, 닝닝, 지젤 등 네 명이 갖고 있는 목소리와 창법부터 이들이 지향하는 맥시멀리즘의 요체가 분명해진다. 흔히 ‘쇠맛’이라고 표현되는 이 그룹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듯, 음색은 대단히 차갑고 날카롭다.

보컬에 공을 들여온 SM엔터테인먼트는 곡에서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을 훨씬 뛰어넘은 파워풀한 고음역과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의 극적인 표현력과 기교를 선보인다. SES의 바다를 시작으로 소녀시대 태연, 레드벨벳의 웬디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K팝에서 ‘디바’ 보컬리스트들의 본산으로 불릴 만하다.

음악의 편곡이나 비주얼 역시 마찬가지다. 새 앨범의 대표곡인 《Armageddon》과 《Supernova》는 ‘최후의 전쟁’ ‘초신성’이라는 각각의 곡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 이미지가 극적이고 스케일 역시 웅대하다. 뮤직비디오 역시 마찬가지다. 슈퍼히어로물을 방불케 하는 키치적인 액션이 압권인 《Supernova》의 뮤직비디오가 에스파식의 맥시멀리스트 청량감이라면, 《Armageddon》 뮤직비디오는 어둡고 난해한 이미지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노래가 가진 복잡다단한 구성과 편곡을 강화했다.

사실 K팝에서 에스파와 같은 맥시멀리즘의 방법론은 제법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음악 트렌드가 아니라 K팝이 갖고 있는 산업적인 비전이나 전략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 K팝이 세계시장에 도전하면서 가장 먼저 맞닥뜨린 과제는 차별화였다. 이미 영미권 음악들이 시장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와중에 K팝은 메인스트림 팝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K팝이 갖고 있는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산업을 진화시켰다.

K팝이 주목했던 것은 ‘팬덤’을 중심에 놓은 새로운 산업의 체계다. 과거 소녀들이 모인 팬클럽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됐던 팬덤은 SNS를 중심으로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K팝 산업은 잠재적 K팝 고관여층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여러 가지 방식에 골몰한다.

그 고민의 한 지점이 바로 강함과 과함을 앞세운 ‘맥시멀리즘 K팝’으로 나타났다. 물론 맥시멀리즘 자체가 상업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팝 음악이나 관습적인 장르 음악의 틈바구니에서 화려한 사운드와 비주얼로 무장한 K팝의 젊은 패기는 매력적이었다. K팝만이 가진 키치적인 맥시멀리즘은 그 맛에 중독된 수많은 마니아층을 양산하는 데 성공했다. 모든 맛 위에 군림하는 ‘중독성’으로 승부를 건 K팝은 틈새시장 전략으로 주류에서 견주는 사실상 유일한 비영어권 대중음악 장르가 됐다.

에스파의 맥시멀리즘 전략은 같은 기획사 출신 소녀시대가 11년 전에 이미 선보였던 맥시멀리스트 걸작 《I Got a Boy》의 방법론을 현대적으로 진화시킨 결과물이다. 그 안에는 ‘대중적인’ 그룹이었던 소녀시대가 갖지 못했던 몇 가지 요소가 더해져 있다. 그중 하나는 ‘세계관’이라 불리는 그룹 고유의 서사적 체계다.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캐릭터의 설정, 혹은 SF 소설의 허구적 배경과도 유사한 세계관은 이제는 K팝의 필수 요소이자 팬덤이 즐기고 참여하는 하위 문화의 일부가 됐다. 산업적으로 음악이라는 IP를 웹툰, 영화, 굿즈 등으로 다양하게 확장시키는 중요한 콘텐츠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에스파는 SM이라는 레이블 정체성의 최신 업데이트판인 동시에 K팝이 20년 넘게 추구해온 음악적·산업적 전략의 요체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K팝 팬들은 에스파의 ‘난해한’ 음악에서 친숙함과 향수를 동시에 느낀다. 새롭지만 동시에 회고적인 에스파의 쇠맛은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레트로이자 뉴트로가 된다.

5월21일 그룹 뉴진스가 서울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서 열린 ‘2024 코리아 온 스테이지-뉴 제너레이션’ 공연 무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예스러운 듯 새로운 뉴진스의 독특함

정반대의 지점에는 뉴진스가 있다. 신곡 《How Sweet》은 K팝이 구현해낸 팝 노스탤지어의 결정판이다. 곰팡내를 살짝 풍기는 올드스쿨 힙합 비트와 ‘뿅뿅’거리는 음원이 연출하는 심플하고 세련된 청량함은 뭐라 특정할 수 없지만, 모든 이의 기억 속에 공존하는 보편적인 ‘레트로’ 향취를 환기시킨다. 하지만 결코 ‘예스럽다’고만 말할 수 없는 신선함이 느껴지는 건 결국 이 요소들이 현대적인 취향과 맥락에서만 재배치돼 활용되기 때문이다.

뉴진스는 결코 ‘미래적’이지 않지만 ‘현대적’이며 이 현대성은 1990년대에도, 세기말에도, 바로 오늘에도 유효하다. 뉴진스의 믹스매치에 특별한 스토리나 논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데뷔 이후 늘 일관된 미학과 정서를 유지해 왔다. 이는 각각의 요소의 합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 이들의 수장인 민희진이 갖고 있는 독특한 미학적인 감각과 밸런스를 통해서만 구현된다.

흥미로운 건 이 같은 평가를 평단뿐 아니라 대중도 정확히 동일하게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미니멀리즘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장점이자 미덕이기도 하다. 꾸미지 않은(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자연스러움, 심플하고 명료한 메시지는 그래서 보편적이다. 뉴진스는 짧고 간결한 모든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현 세대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클래식한 장르들과 레트로한 정서를 고급지게 버무려낸다.

흔히 뉴진스의 음악을 이지리스닝이라고 말한다. 하나 그 본질은 음악 그 자체가 쉽다는 게 아니라 자칫 어려울 수도 있는 음악적 장르와 장치들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선보인다는 데 있는 것이다. 《How Sweet》 역시 마찬가지다. ‘마이애미베이스’라 불리는 올드스쿨 힙합의 작법을 가져와 정교하게 구성했지만 부가적인 설명이나 설득을 요하지 않는, 그야말로 심플하고 직관적인 힙하고 쿨한 미학만이 가득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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