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의자·혐의사실 빼고 기록만 넘겨라” 채 상병 사건 전엔 선례 없던 일

  11 06월 2024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자료사진. ⓒ연합뉴스

정종범 전 해병대 부사령관이 6월11일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다. 정 전 부사령관은 2023년 7월31일 국방부장관 집무실에서 열린 회의에서 채 상병 사건의 경찰 이첩 보류와 관련해 메모를 남긴 인물이다. 그의 메모에는 ‘누구누구 조치 안 됨’ ‘휴가 처리한 후 보고 이후 형식적 휴가 정리’ ‘우리가 송치하는 것으로 비춰짐’ 등이 기재됐다.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등과 관련한 이 전 장관의 지시로 보이는 대목이다.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의 법정 증언도 불쏘시개가 된 상황이다. 유 법무관리관은 앞선 재판에서 정종범 전 해병대 부사령관의 메모가 자신의 발언이 아니라는 취지로 증언했다. 정 전 부사령관의 법정 증언이 이 전 장관의 혐의를 뒷받침할지 주목되는 이유다. 이 가운데 유 법무관리관은 이 전 장관의 경찰 이첩 보류 지시 직후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등에게 “혐의자와 혐의내용을 빼고 기록만 넘기라”며 관련법과 훈령과 어긋난 조언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종섭 발언 메모’ 정종범 증인 출석 예정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항명’ 사건과 관련한 재판은 6월1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소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진행된다. 정종범 전 부사령관 등은 이날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다. 정 전 부사령관은 2023년 7월31일 이종섭 전 장관 주재 회의 내용을 기록한 ‘정종범 메모’의 당사자다.

메모에는 초동 수사를 맡은 해병대 수사단의 결과를 염두에 둔 듯한 내용이 담겼다. ‘누구누구 조치 안 됨’ ‘휴가 처리한 후 보고 이후 형식적 휴가 정리’ ‘법적 검토 결과 사람에 대해 조치 혐의는 안됨(없는 권한임) 우리가 송치하는 모습이 보임’ 등이다. 이는 임성근 전 사단장 등의 복귀와 관련한 이 전 장관의 발언인 것으로 전해졌다. 메모 작성 전후로 대통령실과 군 수뇌부가 통화한 기록이 나온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정 전 사령관의 증언에 따라 ‘윗선’의 개입 여부가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2023년 8월21일 2명만 경찰에 이첩했다. 초동 수사를 맡은 해병대 수사단의 결과(임 전 사단장 포함 8명)에서 혐의자를 6명이나 축소한 것이다.

조사본부는 당초 중간보고서에서 임 전 사단장 등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지만, 보름도 안 돼 이를 뒤집는 최종결과를 이 전 장관에게 보고했다(6월5일자 <국방부 조사본부도 '임성근 혐의 정황'...軍법무관리관실 반대 보고서에 뒤집힌 결론> 기사 참조). 핵심 증인인 정 전 부사령관은 지난 5월17일 재판에는 불출석했다.

 

‘법률 참모’ 자문 없이 이첩 보류 결정?

또 다른 핵심 증인인 유재은 법무관리관은 주요 사안에 대해 함구했다. 이종섭 전 장관의 경찰 이첩 보류 과정과 대통령실 개입 여부 등에 대해서다. 다만 이 전 장관의 결정 과정에서 자문한 적은 없다고 했다. 이 전 장관이 ‘법률 참모’인 국방부 법무관리관의 자문 없이 해병대 수사단의 경찰 이첩을 보류한 것이다.

되레 이 전 장관이 ‘이첩 방법’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고 했다. 유 법무관리관은 5월17일 재판에서 “(2023년 7월31일 회의에 들어간 직후) 장관이 처음 물어봤던 내용은 군인의 사망 원인이 된 사건의 이첩 방법에 관해서였다”라고 증언했다. 해병대 수사단의 결론대로 8명의 혐의자를 경찰에 넘기는 대신 다른 방안을 모색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유 법무관리관은 이에 대해 “혐의자를 특정하지 않고 사건을 넘기는 방안이 있다”고 답했고, 이에 이 전 장관은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군인 사망 관련 범죄를 민간 수사기관에 이첩하는 경우 혐의자와 혐의사실을 적시하지 않고 기록만 보낼 수 있다는 해석을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가 나온 상황이었다. 박 전 단장은 2023년 7월28일 8명 모두에게 업무상과실치사 혐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이 전 장관은 조사 결과의 경찰 이첩을 결재했다가 바로 보류했다. 박 전 단장은 수사 외압 의혹을 폭로했고, 현재 상관명예훼손 등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수사 외압’ 의혹 핵심 인물인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왼쪽부터) ⓒ연합뉴스·시사저널 박은숙

장관 결정 직후 급박했던 국방부 법무관리관·군사보좌관

국방부는 이종섭 전 장관의 결정과 맞물려 발빠르게 움직였다. 유재은 법무관리관은 2023년 8월1일 박정훈 전 수사단장 및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연이어 통화했다. 박 전 단장에겐 경찰 이첩 보류와 이첩 방법 등을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이러면 안 돼요. 내가 혐의자, 혐의내용 빼라고 했잖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 전 단장은 “수사 개입”이라며 반발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은 기록으로 드러났다. 박 전 단장의 상급자인 김 사령관의 수첩이다. 수첩에는 ‘법무관리관의 조언’이라는 문구와 함께 ‘이첩 시 확대축소(광의, 협의)’ 등의 내용이 담겼다. ‘우리가 혐의자는 예단해 줄 필요가 없다. 따라서 혐의자를 특정짓는 것이 맞지 않다’는 내용도 기재됐다. ‘수사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라’ ‘조사본부는 이첩하지 말아라’는 메모도 발견됐다.

유 법무관리관은 이밖에도 김 사령관과의 통화에서 “우리의 조사 결과에 대해 경찰 평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 “결과를 다르게 볼 수 없을 것이다. (군 내에서) 두 개의 결과가 나오면 군 전체가 의심받게 돼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진희 당시 군사보좌관은 같은 날 김 사령관에게 ‘확실한 혐의자는 수사 의뢰, 지휘 책임 관련 인원은 징계로 하는 것도 검토해달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국방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유 법무관리관은 이러한 내용을 박 보좌관에게 조언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제가 장관님 지시사항을 수명했는데, (박정훈) 단장께서 (수사 개입이라고) 이렇게 말씀하셔서 좀 그런 부분이 있다”고 알렸다고 했다. 김계환 사령관의 메모에 대해선 “기억나지 않는다”며 “김 사령관에게 확인하라”고 했다.

 

혐의자·혐의사실 제외해 이첩...채 상병 사건 전 선례 없어

이처럼 혐의자와 혐의사실을 제외한 채 민간 수사기관에 이첩한 선례는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유재은 법무관리관은 “이첩 방식에 있어 (혐의자와 혐의사실을 제외하고 이첩한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국방부가 이종섭 전 장관의 결정에 맞춰 이첩 방법을 짜 맞췄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군사법원법 제228조는 군검사와 군사법경찰관이 범죄 혐의가 있다고 보이면 범인과 범죄사실 등 증거를 수사해야 하고, 재판권이 군사법원에 없는 범죄를 인지한 경우 대검찰청 등에 사건을 이첩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특히, 수사절차훈령 제7조는 인지통보서를 작성해 송부하도록 했다. 인지통보서에는 통상 피의자, 죄명, 범죄사실 등을 기재한다. 피의자는 수사기관에 입건된 범죄혐의자를 의미하는 만큼 인지통보서엔 혐의자를 특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 법무관리관은 이와 관련해 “훈령을 바꾸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면 지침을 먼저 내려보내기도 한다”며 “이는 훈령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국방부 조사본부가 8명의 혐의자 가운데 6명을 삭제한 것이 현행 법령과 배치 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증언거부권을 행사했다. 박정훈 전 단장의 재판에는 이 전 장관도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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